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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라는 문학적 사건 <최현식 지음>나의 이야기 2025. 1. 20. 00:01
다음 이미지 발췌 서정주라는 문학적 사건 <최현식 지음>
미당 서정주(1915~2000)는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서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문제적 인물’에 속한다. 한쪽에선 빼어난 감수성으로 토착어의 아름다움을 드높인 시인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선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독재 시기에 권력에 순응해 지조를 팔아넘긴 인물로 지탄한다. 그렇게 논란이 거세다 보니 미당에 대한 작가론과 작품론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최현식 인하대 교수가 쓴 ‘서정주라는 문학적 사건’은 밝음과 어둠이 뒤섞인 미당의 문학 세계를 두루 아울러 깊이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지은이는 “미당의 한국 시에 대한 숱한 긍정적 기여와 몇몇 부정적 국면을 함께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또 미당 연구자이자 비평가인 나에 대한 선한 영향과 준엄한 계고를 잊지 않기 위해” 책의 제목을 ‘문학적 사건’이라고 붙였다고 밝힌다.
이 책에는 지은이가 2003년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여년 동안 쓴 논문 13편이 실렸다. 식민지 시기의 초기 시에서부터 만년의 ‘시적 자서전’에 이르기까지 서정주의 시와 산문에 대한 고찰이 시대순으로 실렸다. 그런 고찰에 미당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들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함께한다. 이를테면 초기작 ‘자화상’은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해 “시의 이슬”을 지나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로 끝난다. 지은이는 이 시가 “자아의 궁핍한 삶을 ‘시의 이슬’에 대한 의지로 전환하는 존재론적 욕구와 미적 감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자아의 분열이나 윤리적 성찰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말한다. 윤리적 성찰이 없다는 이 사실이 이후 서정주가 걸은 길의 방향을 미리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서정주라는 문학적 사건> 책을 읽으면 그의 작품평을 바로 알게 되리라. - <서정주라는 문학적 사건>최현식 지음 발췌해서 올린 글 - 작성 김길순-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숫개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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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이다. 첫행부터 치열하다. 마지막 행도 역시 치열하다. 첫 행은 자기 아비가 종이었다고 과감히 폭로하는 강세를 보였고, 마지막 행에서는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고 떠 외고 있다. 이러한 정서의 강렬한 분출은 댐의 수문을 한꺼번에 많이 여는 경우처럼 독자를 격하게 한다. '종'이란 한국의 봉건사회에서는 천민이라 하여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계층에 속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야성이 서정주의 시세계를 학장하는 에너지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당 서정주 시인님(1915~2000)은 1915년 전북 고창 출신으로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 1941년 첫 시집 「화사집」을 비롯, 「귀촉도」 「서정주 시선」 「신라초」 「동천」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서으로 가는 달처럼···」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안 잊히는 일들」 「노래」 「팔할이 바람」 「산시」 「늙은 떠돌이의 시」 「80소년 떠돌이의 시」 등 15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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