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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
조은설
저 푸르른 바닷속 삶도 들여다보면 녹록치 않아
세상 어디에서도 적용되는 생존의 법칙 앞에
멸치는 너무 작고 생은 짧아
그래, 뼈대를 키웠다 뼈대 있는 멸치가 되었다
물결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은
멸치의 꿈이 물이랑 사이사이 반짝이기 때문
어마어마한 멸치 떼의 군무 앞에
고래도 가끔 오금이 저린다
덩치가 크고 힘을 가졌어도
약한 것들이 뭉쳐 산을 이룬다면
우당탕
돌파의 문은 열리기 마련
팔뚝에 불끈 근육을 세운 어부가
촘촘한 그물로 바다를 낚을 때는
절대 물샐틈없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도
은빛의 빛나는 기억들을 굳히며
뼈대 있는 가문의 후예답게
멸치는 죽음조차 의연하고 단단하다
작은 몸으로 바다를 제압하던 멸치의 군무
고래를 떨게 하던 멸치들의 힘
사람들이 밥상 위의 멸치를 즐겨 먹는 것은
요즘은 좀처럼 찾기 어려운
뼈대 있는 지조가 그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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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설 / 본명 조임생.
2012년 《미네르바》 신인상 시 당선.
시집 『소리들이 사는 마을』 『아직도 나는 흔들린다』 『사랑한다는 말은』 『거울 뉴런』 『천 개의 비번을 풀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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