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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순 옆 얼굴
강미정
고구마 밭에 쪼그리고 앉아 더딘 손길로 고구마 순을 투둑투둑 따내던 하루, 친구와 약속한 영화를 보러가지 못한 나는 하루가 차암 지루하여 날 참 길다 길다, 입이 댓발이나 나와 똬리 열 두 개 걸고도 남을 입 좀 봐라, 서리가 내리기 전 고구마 순을 다 걷어야지, 걷어야지, 지는 햇살 속 서리 인 바람이 굴밤나무 잎을 쓸어낸 가지를 흔들고 가는 게 보였는데, 뉘엿뉘엿 앞산 너머로 넘어가던 해를 주름 진 얼굴에 잠시 붙잡아 놓으시곤, 길게 후욱, 담배연기 뿜어내시며 거, 차암, 해 빨리 식네, 하실 때 붉게 떨리는 서걱임이 굴밤나무 가지 끝에서 인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 가슴께서 뿌욱, 가늘게 인 것도 같아 댓발이나 기어 나온 입이 쑥 들어간 내 가슴쪽이 서늘해져,
보이지 않던 허연 귀밑머리 눈 붉게 적시는 저녁, 해 떨어진 뒤 잠시 고왔던 먹구름 한 무더기, 베란다에 서서 같이 쳐다보며 차암 해 빨리 식네, 빨리 식네, 굽어보는 귀밑머리 허연, 당신의 옆얼굴
강미정 시인 -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시문학> 등단
1996년 시집 < 타오르는 생 > -도서출판 빛남
2001년 시집 <물 속 마을> -도서출판 전망
2003년 시집 <상처가 스민다는 것> -천년의 시작-작성 김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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