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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시집<질마재 신화에서~신부>나의 이야기 2015. 1. 16. 04:00
서정주 시집<질마재 신화에서~신부>/김길순
신부 /서정주 시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
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
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짜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 그래
도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
때서야 매운 제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시집『질마재 신화』1975)
비극적 설화를 바탕으로 한 서정주의 신부,란 작품이다. 신비주의적인 내용에다 다분히 관능적인 소
재를 다루고 있어 읽는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은 재가 되어 버리는 신부의 비극이 더욱 처절하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신부의 수동적이고 침착한 기다림과 신랑의 조급성이 대립됨으로써 처절한 비극
이 유발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신랑의 잘못된 선택으로 신부를 두 씩이나 죽이고 만
셈이다.
이렇듯 이 시는 한 여인의 한 속에 담긴 숙명적 비극, 인생의 유한함과 허망함, 육체를 초월한 영적 존
재의 아름다움 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러한 서정이 쉬운 이야기 구조와 산문적 가락 속에 교묘
하게 복합적으로 녹아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성숙한 시제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한국 현대시500선에서 발췌-
※ 돌쩌귀 : 문짝을 문설주에 달아 여닫는 데 쓰는 두 개의 쇠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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