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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장석주)나의 이야기 2020. 11. 20. 00:05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장석주
어렸을 때 내 꿈은 단순했다, 다만
몸에 맞는 바지를 입고 싶었다
이 꿈은 늘 배반당했다
아버지가 입던 큰 바지를 줄여 입거나
모처럼 시장에서 새로 사온 바지를 입을 때조차
몸에 맞는 바지를 입을 수가 없었다
한창 클 때는 몸집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니
작은 바지는 곧 못 입게 되지, 하며
어머니는 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사오셨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나를 짓누른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내 몸을 입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충분히 자라지 못한 빈약한 몸은
큰 바지를 버거워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통 사이로
내 영혼과 인생은 빠져 나가 버리고
난 염소처럼 어기적거렸다
매음녀처럼 껌을 씹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나는 바지에 조롱당하고 바지에 끌려다녔다
이건 시대착오적이에요, 라고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향해 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모멸스런 인생
바지는 내 꿈을 부서뜨리고 악마처럼 웃는다
바지는 내게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라고 참견한다
원치 않는 삶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진작 바지의 독재에 저항했어야 했다
진작 그 바지를 찢거나 벗어 버렸어야 했다
아니면 진작 바지에 길들여졌어야 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오, 급진적인 바지
내 몸과 맞지 않는 바지통 속에서
내 다리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불사조처럼 군림하는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검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끝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내 인생을 뒤흔든다
장석주 시인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햇빛사냥], [그리운 나라],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한 바지] 평론집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 [비극적 상상력], [문학, 인공정원]
소설 [낯선 별에서의 청춘], [길이 끝나자 여행은 시작되었다], [세도나 가는 길]
현재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소설창작 강의,질마재 문학상 수상,
카페 <시인회의>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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