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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사에서 획기적인 분수령을 이룩한 예술가로 비중이 큰 나혜석 화가
    나의 이야기 2022. 4. 18. 00:03

     

     

    TV-E(channel)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서양화가 나혜석 조명을 보고 화가의 삶을 보면서 여성으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음을 조명한 TV프로 줄거리를 올린다.

     

     

    나혜석은 1896년 경기도 수원 '나 부잣집'의 2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군수를 지내며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고 개화의 바람에 빠르게 대응하던 아버지 덕에 나혜석은 누구보다 빠르게 근대적 신교육을 받았다. 일본도쿄여자 미술전문학교 서양학과로 미술 유학을 다녀온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서양 화가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결혼할 남자에게 3가지 조건을 걸었다. 

     

    첫째 조건은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둘째 조건은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셋째 조건은 시머머니와 전처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을 걸었다.

    신혼여행지는 자기가 정하게 해 주시오. 였다.

     

    죽은 첫 애인의 무덤으로 신혼여행 가기, 부부 동행 세계일주, 최린과의 불륜, <이혼 고백서> 발표,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등 파격적인 일 때문에 그동안 나혜석은 드라마틱한 소재로서 많이 부각되었다.

     

     

    1920년 결혼한 후 나혜석은 화가와 작가로서의 일에 출산, 육아, 가사일까지 해야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이 만주에서 부영사 임무를 마친 것에 대해 일본 외무성에서 포상을 주어 삼남매를 시댁에 맡겨놓고 세계 여행을 떠나게 된다. 유학 중 법학 공부를 위해 남편 우영이 베를린으로 가고 나혜석은 홀로 파리에 남아 미술공부를 하기로 한다. 남편은 친구 최린에게 아내의 파리 생활을 부탁하는데, 최린은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대표 중 한 명으로 전해 진다.

    이 때 나혜석은 우영의 친구 최린과 사귀게 된다. 이 일로 남편과 이혼을 하게 된다. 아이들도 재산 분할도 없이 거리로 내쫒긴다.

     

     

    이혼 후 고국에 돌아와 미술 학원를 열어 많은 지망생들이 모여들었지만 곧 바람난녀란 낙인이 찍혀 더는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1920년 때만 해도 우리나라 여성의 정조 관념은 법에서도 용서치 않을 때였다. 화가로서 한 여인의 일생이 평탄치 못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 삶에 앞서 근대 여성사에서 획기적인 분수령을 이룩한 선구자이자 예술가로서 역사적 비중이 상당히 크다. 그런데 그의 예술세계는 아직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실제로 나혜석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만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1948년 12월 어느 날, 행려병자로 서울시립자제원에 들어오는데 그 때 나이 53세였고 12월 10일 무연고자로 사망한다.  -TV를 보고 -작성 김길순-  (조원재, 블랙피쉬) 작성자 프리티쌤 글 참고 했음- 

     

    나혜석 화가 그림 다음이미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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