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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452. 베이컨을 좋아하세요?나의 이야기 2023. 10. 20. 00:01
뉴욕중앙일보 컬럼, 잠망경
서 량 2023. 10. 17. 20:3|컬럼| 452. 베이컨을 좋아하세요?
서 량
‘배다’를 네이버 사전은 이렇게 풀이한다. ➀스며들거나 스며 나오다, 버릇이 되어 익숙해지다. 냄새가 스며들어 오래도록 남아 있다. ➁배 속에 아이나 새끼를 가지다, 물고기 따위의 배 속에 알이 들다. ➂물건 사이가 비좁거나 촘촘하다, 생각이나 안목이 매우 좁다. ➃배우다 (비표준어)
한자어로 ➀을 습관 ➁를 임신 ➂을 치밀 ➃를 학습으로 명사화 해서 생각하면 얼른 이해가 간다. ‘배다’라는 순수 우리말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어원학적으로, ‘배우다’가 ‘배다’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유력해지는 순간이다.
생각해 보라. 배운다는 것이 어떤 정보를 입수한다는 단순한 의미보다 인생경험, 철학적 명제의 깊은 이해처럼 시일과 반추의 기간을 필요로 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그래서 인간은 긴 세월을 학교를 다니고 임산부처럼 일정 기간을 견디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임신 끝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듯 창조적인 결과가 터지는 것이 배움의 결실이다.
공자(孔子: BC 551~479) 제자들이 이룩한 논어(論語) 맨 첫 구절,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살펴본다. 영어로, ‘Isn’t it a pleasure to learn and practice what you learned?’로 싱겁게 번역한다.
이런 말을 미국인들에게 함부로 하면 건방지다는 인상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학구적 사고방식보다 실용적 생활습관을 선호하는 미국인들은 소위 ‘지식층, intelligentsia’을 크게 존경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더 심하다.
배움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면서 산다. 배우려는 마음과 호기심과 심리적 자세를 편애한다. 내게 있어서 언어는 특히 더 그렇다. 괴테(1749~1832) 왈,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He who knows no foreign languages knows nothing of his own.” 나 또한 정신과의사 티를 내면서, “남에 대하여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전혀 배우지 못한다.”고 말하겠다. 이때 ‘남’은 내 환자들도 포함한다.
병동 환자 그룹테러피를 하는 중 배움에 대하여 말한다. ‘learning’이 무엇이냐. 누가 “education’이요!” 한다. 그럼 ‘education’은 뭐냐. “learning’이요!”(?) 배움은 지금껏 몰랐던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라 나는 설명한다. 그리고 “Knowledge is power,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누가 했는지 아느냐, 하고 묻는다.
모두 묵묵부답(默默不答)이다. 잘난 척하며 질문을 던졌지만 나도 얼른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물우물 딴 소리를 하다가 5분쯤 지나서 생각이 난다. 아, ‘Frances Bacon!’ ‘침묵은 바보들의 미덕이다, Silence is the virtue of the fools.’라는 명언 또한 남긴, 내가 되게 좋아하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다.(1561~1626)
베이컨에 대하여 설명한다. 아무도 그가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나는 가끔 이렇게 쓸데없는 말을 환자들에게 하는 습관이 입에 뱄다. 습관 중에는 좋은 습관도 있고 나쁜 습관도 있는 법. 무슨 말이건 거침없이 하는 리처드가 일갈한다. “I like bacon!, 베이컨을 좋아해요!” 다른 환자가 곧바로 호응한다. “Bacon pizza is the best!, 베이컨 피자가 최고라구요!”
© 서 량 2023.10.15
뉴욕 중앙일보 2023년 10월 18일 서량의 고정 칼럼 <장망경>에 게재
• 2023년 현재 뉴욕 근교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는 정신과 전문의 • 서울의대 졸업 후 도미 • 뉴욕한국일보와 조선문학 詩부문 등단 • 2016년, 네 번째 시집『꿈, 생시, 그리고 손가락』출간 • 클라리넷과 색소폰을 즐겨 부는 아마추어 연주가 • 2006년 4월부터 현재까지 뉴욕중앙일보에 고정 컬럼 「잠망경」을 격주로 집필 중.
아버지의 방패연
서 량
아버지가 지금 내 아들보다
더 새파랗게 어린 나이였을 때
나는 철부지 초등학교 2학년이다아버지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내 자식이
얽히고설킨 씨앗이 이어지는 별하늘로이윽고 불어오는 겨울 바람
아버지가 대나무를 가늘게 잘라서
내 앞에서 방패연을 만드신다, 창호지에
창호지에 달라붙은 대나무뾰족뾰족한 잔뼈, 잔뼈
연을 띄운다
등골 시린 지구 끄트머리에서
연신 요동질 치는 연줄, 가느다란 실
그러나 어느새 실이 끊어져, 툭 끊어져
옆집 마당 감나무 가지에 내려앉아, 사뭇
바람결에 흔들리는 반투명 젖빛 창호지
내 아버지의 사각형 방패연
시작 노트:
유년기의 향수심이 트라우마를 능가하는 것 같다. 힘겨운 기억을 솎아낸 과거는 아름다운 과거로 변천한다.지금도 겨울 하늘에 점잖게 군림하던 아버지의 방패연을 떠올리면 마음이 참 든든해진다.
© 서 량 2007.06.29
<詩로 여는 세상> 2008년 가을호, 신작 소시집
(출처): 서량 블로그 (옮겨온 글) -작성 김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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