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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봄을 기다리며나의 이야기 2024. 1. 5. 00:01
봄을 기다리며
김승희
추운 뒷골목에 들어섰을 때
난 남루한 길바닥에 줄줄이 앉아 있는
보랏빛 구근들을 보았네.
추위 때문인지 쇠 단추처럼 단단하게
오그라진 구근들의
이름은
그러나 광석질이 아니고
화사하게도 히아신스와 크로커스라고 했지.
어디서 굴러먹다 온
돌멩이처럼
볼품없는 구근들은
한 개에 오백 원씩,
그 이름을 말할 때
초라하게 살결이 튼 행상 아줌마의
입술에선 이상하게도 봄 향기와 봄 들판의 환히
열려진 꽃봉오리들이 바람의 치아처럼 언뜻 보였네.
난 그것들의 생명을 믿지 않았고
그것들의 기다림을 믿을 수도 없었지.
너와 나는 이미 가망이 없어 보였고
이 도시-긴 겨울-
빙하가 단단한 얼음 벽돌들을 층층히 쌓아 올려
빙하 시대의 완강한
불임권을
형성한
이 곳에서
나는 차마 하나의 구근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는 이적을 기다릴 수는 없었네.
나는 그냥 지나쳐서
바삐 걸어갔지
사람과 부딪치며 계속 난전들의 골목을
헤쳐 가고 있을 때
난 아득하게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강물 삐걱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어.
모든 봄은 한 개의 꽃 뿌리에서 시작되고
모든 빙하는 한 개의 꽃봉오리에서부터
녹기 시작한다고
그것은 내 머리에서 피가 도는 소리 같았고
그 환각의 약초가 흔드는
꽃바람 방울 소리는
어질어질 나의 수족 마비의 겨울 문고리를
잡아 헤뜨리고 있었네.
황망히 뒤돌아
다시 그 시장통 골목을 찾아갔을 때
어디서 굴러먹다 온 개 뼈다귀처럼
못 생긴 그 구근들이
어쩌면 미륵불을 닮아 보였고
집에 돌아온 나는
물병 위에 그 보랏빛 구근들을 심어
햇빛 바른 창턱 위에 환히 올려 놓고
이것이 내일인가-
아 이것이 내일이다-
매일 아침 물병 속으로 뻗어 가는
봄 꽃들의 파란 실뿌리를 오래오래
기쁨에 차서 바라보는 것이었네.
그리고. 친구여.
나에겐 내일이 생겼어.
비로소 난 가졌지.
기다리는 봄을.
이것이 내일이다고 외칠 수 있는
자그만 한 개의 사랑스런 봄을.
※ '초라하게 살결이 튼 행상 아줌마의 입술에서' 언뜻 보였던 봄은 이제 '모든 봄은 한 개의 꽃 뿌리에서 시작되고 모든 빙하는 한 개의 꽃봉오리에서부터 녹기시작한다고' 말하는 환청으로 인해 화자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하게 한다. 화자는 이제 겨울 같은 도시에서도 봄을 기대하게 되었으며, 이 믿음이 화자에게 발걸음을 돌려 구근들을 집으로 사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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