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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고단한 삶이 시가 됐다나의 이야기 2024. 12. 1. 22:17
고단한 삶이 시가 됐다
신경림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벅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신경림<농무> 전문
1970년 늦여름 어느 날, 청진동의 ‘창작과비평’(창비) 사무실 건너편 다방 앞에서 누군가와 막 헤어지고 돌아서던 시인 신동문 선생이 그 다방으로 걸어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마침 잘 만났다는 듯이 내게 원고 하나를 건네주었다. 당시 신동문은 창비 발행인이고 나는 편집장인 셈이었는데, 그는 원고를 내밀며 작자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곁들였던 것 같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그때까지 신경림이란 이름의 시인이 있는 줄도 몰랐다.
다방에 앉아 다섯 편의 시를 단숨에 읽으며 나는 말할 수 없는 충격과 흥분을 느꼈다. 그것은 서정주나 김현승, 김수영이나 김춘수 등 그때까지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시들과 너무나 다르면서도 문단의 지배적 관행에 가려져 있던 어떤 중요한 핵심을 여과 없이 드러낸 시라고 생각되었다. 이런 글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은 잡지 편집자에게는 드문 행운이었다. ‘눈길’ 등 다섯 편이 실린 그해 가을호 창비가 시중에 나오자 주위의 벗들은 무릎을 치며 환호했고 독자들로부터는 신경림이 누구냐는 문의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새롭게 전개될 한국시의 개막선언이었다.
1973년에 나온 신경림 시인의 시 <농무>는 우리 문학사에 큰 충격을 줬다. 신 시인은 산업화시대 소외되고 가난한 농민의 현실을 절절하게 풀어냈다. 징과 꽹과리, 장고를 치며 춤을 추는 농민들의 한과 울분을 쉽고 담담한 언어로 그려냈다. 이념과 구호가 팽배했던 기존의 현실 참여시와는 전혀 다른 시가 등장한 것이다. <농무>는 이듬해 소설가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과 겨뤄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
<농무>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친, 농경 사회가 해체되고 산업 사회가 형성되는 시대 변화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시집이다.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무능력의 표지이고, 그럼에도 농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짓누른 것은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원통함”이다. 그들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거나, “서림이처럼 해해 대”고, “기름집 담벽에 기대 서서 철없이 킬킬 대고” 있는 처녀들의 눈길을 의식해 신명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어쩐지 그 신명은 공허하다. 그들의 신명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라는 자포자기 또는 무력감에 짓눌려 있는 것이다. 기껏해야 함께 몰려다니며 소줏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으로 한 서린 가슴을 달래는 농투성이들. 그 피폐한 삶의 풍경을 사실주의적 문체로 보여준 신경림의 <농무>. 시는 비밀스럽고 암호적인 은유와 상징의 고급 언어 예술로 여겨지기 일쑤다. 그러나 <농무』> 실린 시편들은 친근한 민중 언어로 농경 사회적 풍물과 정서를 알뜰하게 담아낸다. 신경림은 이 한 권의 빼어난 시집으로 다음 세대 앞에 민족 문학의 큰 어른으로 떠오른다.(염무웅 문학평론가) -작성 김길순- 카페 시인회의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