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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물을 들이면서
박순호
치자꽃 피는 한철 내내
뜨락에서 지냈다
매일 아침 닦았던 구두에는 푸른 빛이 감돌고
나와 함께 사라진 회사처럼
붙박이가 되었다
걸어갔거나
미처 걸어보지 못했던 길에 핀 치자나무
챙겨온 유니폼에서 치자 향이 났다
치자 열매가 달렸을 때도
긴 소매 옷을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채
전지가위와 호미가 손에 들려 있었다
대문은 조용했고 이따금 집배원이 다녀갔다
나는 폐간된 잡지처럼 침묵을 지켰고
하루에도 몇 번씩 시무룩하다가도
바람이 잔잔하고 볕이 들면
치자 열매 끓는 솥을 들여다보곤 했다
치자빛 스며든 광목이 뜨락에 펼쳐진다
꽃밭이다
여름과 가을을 담아내고
쓸모없는 생각과 불친절한 날씨를 걸러 꽃을 폈다
노랑나비가 날아와 앉는다
시집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삼킬 때』 2021 시인동네
박순호 시인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2001년 《문학마을》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무전을 받다』 『헛된 슬픔』
『승부사』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삼킬 때』
[출처] 치자물을 들이면서 / 박순호 | 마경덕 시인 카페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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