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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흰 바람벽이 있어
    나의 이야기 2021. 10. 14. 00:02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근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메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나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 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굿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느 사이엔가

    이 흰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잠'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 이 시는 고향을 떠나 쓸쓸하고 외로운 처지에 있는 화자가 쓸쓸한 흰 바람벽을 보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에 대한 감상을 한 편의 영상물처럼 그려 낸 작품이다. 흰 바람벽에 어렵게 살아가는 늙은 어머니, 사랑하는 사람이 스쳐 지나가면서 화자는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움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의 처지를 운명으로 알고 체념하지만 곧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현재 자신의 외롭고 힘든 처지를 극복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시어 풀이

    *바람벽 : 방이나 칸살의 옆을 둘러막은 둘레의 벽.
    *촉(燭) : 촉광. 빛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
    *때글은 : 때에 그은. 때가 묻어 검게 된.
    *앞대 : 남쪽. 여기서는 한반도 남쪽 바다를 의미함.
    *개포 : ‘개’의 평북 방언.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이즈막하야 : 시간이 이슥하게 지나서.
    *울력 :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일함.
    *눈질 : 눈으로 흘끔 보는 것.

     

     

    작가 소개 - 백석(白石, 1912 ~ 1995)

    시인. 평안북도 정주 출생. 서민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현실감 있게 그려 내면서 우리 민족 공동체의 정서를 드러내었다. 또한 여행 중에 접한 풍물이나 체험을 표현한 기행 시와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창작하였다. 작품으로 ‘여승’,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 등이 있다.       -작성 김길순-

     

     

     

    박광숙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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