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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천명, 가을날 시와 수필 한편을 올립니다.
    나의 이야기 2022. 10. 8. 00:03

     

    가을날

                                       노천명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에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


    여기저기 흩어져 촉촉히 젖은

    낙엽을 소리없이 밟으며

    허리띠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드어 거닐어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들고

    이슬에 젖은 치마자락 휩싸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수필)

    설야 산책(雪夜散策)

                                                                                                                                            노천명 

      저녁을 먹고 나니 퍼뜩퍼뜩 눈발이 날린다. 나는 갑자기 나가고 싶은 유혹에 눌린다. 목도리를 머리까지 푹 눌러 쓰고 기어이 나서고야 말았다. 나는 이 밤에 뉘 집을 찾고 싶지는 않다. 어느 친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이 눈을 맞으며 한없이 걷는 것이 오직 내게 필요한 휴식일 것 같다. 끝없이 이렇게 눈을 맞으며 걸어가고 싶다. 이 무슨 저 북구 노르웨이에서 잡혀 온 처녀의 향수이랴.

      눈이 내리는 밤은 내가 성찬을 받는 밤이다. 눈이 이제 제법 대지를 희게 덮었고, 내 신바닥이 땅 위에 잠깐 미끄럽다. 숱한 사람들이 나를 지나치고, 내가 또한 그들을 지나치건만, 내 어인 일로 저 시베리아의 눈 오는 벌판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으냐. 가로등이 휘날리는 눈을 찬란하게 반사시킬 때마다 나는 목도리를 푹 쓴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느끼면서도 내 발길은 좀체 집을 향하지 않는다.

      기차 바퀴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지금쯤 어디로 향하는 차일까. 우울한 찻간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속에 앉았을 형형색색의 인생들--기쁨을 안고 가는 자와 슬픔을 받고 가는 자---을 한자리에 태워 가지고 이 밤을 뚫고 달리는 열차. 바로 지난해 정월 어떤 날 저녁, 의외의 전보를 받고 떠났던 일이, 기어이 슬픈 일을 내 가슴에 새기게 한 일이 생각나며, 밤차 소리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워진다.

      이따금 눈송이가 뺨을 때린다. 이렇게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내 맘속에 사라지지 못할 슬픔과 무서운 고독이 몸부림쳐, 거의 내가 견디어 내지 못할 지경인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리하여, 사람은 영원히 외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뉘 집인가 불이 환히 켜진 창 안에선 다듬이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어떤 여인의 아름다운 정이 여기도 흐르고 있음을 본다. 고운 정을 베풀려고 옷을 다듬는 여인이 있고, 이 밤에 딱다기를 치며 순찰을 돌아 주는 이가 있는 한, 나도 아름다운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머리에 눈을 허옇게 쓴 채, 고단한 나그네처럼 나는 조용한 내 집 문을 두드렸다. 눈이 내리는 성스러운 밤을 위해 모든 것은 깨끗하고 조용하다. 꽃 한 송이 없는 방안에 내가 그림자같이 들어옴이 상장(喪章)처럼 슬프구나.

      창밖에선 여전히 눈이 싸르르 내리고 있다. 저 적막한 거리거리에 내가 버리고 온 발자국들이 흰 눈으로 덮여 없어질 것을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누웠다. 회색과 분홍빛으로 된 천장을 격해 놓고,

    이 밤에 쥐는 나무를 깎고, 나는 가슴을 깎는다. -작성 김길순-

     

    노천명 시인

    출생 1912년 9월 1일사망1957년 12월 10일 (향년 45세)

    학력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졸업경력1946.~ 부녀신문 편집차장

     

     

    다음 이미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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