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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의 생각
마경덕
식혜에 동동 뜨는 잣
참 가볍다
딱딱한 껍질에 숨어 한 송이로 부풀 때까지
하늘에 바친 기도는 얼마나 무거울까
겁 많고 속이 무른 잣
높은 나무에 매달려 아슬아슬 간덩이를 키웠지만
앞니로 깨물거나 망치로 살짝 건드려도
지레 으깨져
고작, 혀끝만 적시는
한 알의 살점
허기진 입을 채우려면 어림없을 거라고
귀찮고 까다로운 제 몸을 믿었을 것인데,
할머니가 누누이 일러준
머리 검은 짐승은 믿지 못한다는 말
잣나무에게 전해주지 못했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흰 살점만 발라내는
잣 까는 기계들
탈피 된 알몸이 수북이 쌓이고
순식간에 잣의 믿음이 사라지고 있다
「시에」 2023. 가을호
출처 - 잣의 생각 마경덕 카페 작성자 김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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