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시) 흰 바람벽이 있어
    나의 이야기 2024. 9. 13. 00:01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심오촉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당나귀 구글 이미지 발췌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호거리는 삶은 수수께끼  (75) 2024.09.18
    도시의 야경  (102) 2024.09.16
    달 달 무슨 달  (94) 2024.09.12
    (동시) 감자꽃  (76) 2024.09.11
    (詩) 인생찬가(롱펠로우)  (88) 2024.09.10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