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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지우개 외 1편나의 이야기 2022. 4. 13. 00:03
분홍 지우개
안도현
그대에게 쓴 편지를 지웁니다
설레다 써버린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냅니다
그래도 지운 자리에 다시 살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생각
분홍 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그리운 그 생각의 끝을
없애려고 혼자 눈을 감아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습니다.
땅
안도현내게 땅이 있다면
거기에 나팔꽃을 심으리
때가 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랏빛 나팔소리가
내 귀를 즐겁게 하리
하늘 속으로 덩굴이 애쓰며 손을 내미는 것도
날마다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리
내게 땅이 있다면
내 아들에게는 한 평도 물려주지 않으리
다만 나팔꽃이 다 피었다 진 자리에
동그랗게 맺힌 꽃씨를 모아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를 주리
찔레꽃
안도현
봄비가 초록의 허리를 몰레 만지다가
그만 찔레 가시에 찔렸다
봄비는 하얗게 질렸다 찔레꽃이 피었다
자책, 자책하며 봄비는
무려 오백 리를 걸어갔다.
안도현 시인, 대학교수
시인은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연어 이야기』 『관계』,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냠냠』 『기러기는 차갑다』, 산문집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발견』 『잡문』 『그런 일』 『백석 평전』 등을 펴냈다. 석정 시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작성 김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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