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리서도 보이는 꽃
엄한정
모란
밤중의 소나기에 해갈하는 꽃
역겨운 비누 냄새 씻고
맨몸으로 풀밭에서
간지럼을 먹고 있다
속살과 잔뿌리가
일어서는 팽팽한 탄성
자지러지는 꽃술이
단비의 혀 속에서 녹는다
북을 찢는 공주의 얇은 입술처럼
현기를 동반한 꽃잎이 파르르 떤다
두터운 포옹에
떨며 만나는 진홍빛 밤의 개화
심지에서 피어나는 나의 모란
아내여, 지금도 풀향기 은은한
푸른 산처럼 멀리서도 보이는 꽃.
물빛 처럼
엄한정
고인 물은 군데군데 얼어붙고
얼지 않은 센 물살에 / 아직도 씻기고 있는돌
두드리면 여전히 돌 소리 낼뿐
또다시 십년을 닦기면 / 옥 다듬는 소리를 낼까.
미친개에 물린 /상처는 아물었는데
사십 년의 가슴앓이는 / 언제 나을고
찬물에 / 몸을 담가 / 돌과 / 함께 씻기면
혼돈은 / 안개를 벗고 / 물빛처럼 맑은
생각만 금맥으로 남을까.
분꽃
엄한정
분꽃은 저녁에 피는 꽃
분꽃이 필 때
누나는 일터로 간다
분꽃 같은 누나 얼굴
분꽃 이슬은 누나의 땀방울
아침에야 얼굴 숙여 집으로 돌아온다.
*********************
나의 작품이 어느 정도의 생명을 지닐 수 있을까.
미래의 독자를 상상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 즐거운 일이다.
미래의 독자에 국한될 성질의 것이라 할 수 없다.
오늘에도 그와 같은 미지의 독자가 있을 수 있으며 나는 그들을 향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시 짓기를 하며 또한 시집을 엮는 것이다.
-머리말에서- 2023년 6월 7일 초판인쇄
-작성 김길순-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詩) 오월이 가네 (83) 2023.05.31 산에 산에 피는 꽃은 (67) 2023.05.30 (詩) 무등 식혜 (68) 2023.05.28 반 고흐 그림과, 폴 고갱의 그림 (97) 2023.05.26 산문로 7번가(뻐꾸기 수다) (78) 2023.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