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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꽃과 찔레꽃
김길순
장미꽃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찔레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장미꽃은 꽃의 여왕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나는 왠지 장미꽃을 좋게만 보지 않는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마리아 릴케가 장미꽃 가시에 찔려 죽었다고 해서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장미꽃은 화려해도 진드기가 많이 낀다. 마치 아름다운 여자에게 남자들이 많이 끓는 것처럼 그 꽃이 질 때는 지저분하게 진다. 장미꽃은 마치 립스틱을 짙게 바른 도시의 요요정 같기도 하다.
여기에 비하여 찔레꽃은 화려하기보다는 약간 촌스럽게 여겨진다. 그 꽃은 시골에서 피기 때문이다. 김동리의 소설「찔레꽃」을 보면 찔레꽃 풍경이 여실히 나타난다.
올해사 말고 보리 풍년은 유달리 들었다. 푸른 하늘에는 솜뭉치 같은 흰 구름이 부드러운 바람에 얹히어 남으로 남으로 퍼져나가고, 그 구름이 퍼져나가는 하늘가까지 훤히 벌어진 들판에는 이제 바야흐로 익어가는 기름진 보리가 가득히 실려 있다. 보리가 장히 됐다 해도 칠십 평생에 처음 보는 보리요, 보리밭 둑 구석구석이 찔레꽃도 유달리 야단스럽다. 보리 되는 해 으레 찔레도 되렸다.
“매애-. 매애-.”
찔레꽃을 앞에 두고 갓난 송아지가 울고,
“무우-, 무우-.”
보리밭 둑 저 너머 어미 소가 운다.
찔레꽃과 함께 농촌 풍경이 여실히 살아나고 있다. 이와 같이 시골의 보리밭둑에 피어있는 찔레꽃을 생각하면 수줍음 타는 시골의 처녀가 연상된다. 풋보리 냄새도 싱그러운 보리밭 둑에서 도시로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며 자주고름을 입에 물고 잘근잘근 씹는 그런 순박하고 안쓰러운 청순가련형의 처녀가 떠오른다.
고향에서 불을 지피리.
새가 되어
저승길 벼랑을 벗어나
구만리장천에 떠도는 새가 되어
그대, 수줍음 가득한 그대
꽃잎을 따먹고
열매를 따먹고
해를 따먹고 불타는 사랑
벌건 피똥에 씨알을 떨어뜨려
이승까지 떨어뜨려
고향의 심심산골 홀로 피게 하였다가
아무도 몰래
공주 만나러 가는 원효 같이
그대, 혼곤한 골짜기
꿈꾸듯 홀연히 불을 지피리.
- 황송문의 시 「찔레꽃」-
나는 그대 꽃잎을 따먹는다거나, 열매를 따먹는다거나, 골짜기에 불을 지피겠다고 상징적 언어를 은유하는 황송문 시인의 시세계를 눈치 채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골의 찔레꽃 같은 처녀는 도시의 바래지고 요염한 여인과는 달라서 순수하기 때문에 자기만 몰래 숨겨두고 영원히 차지하며 누리겠다는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도시의 장미꽃 같은 여인도 그렸는데, 이 찔레꽃과는 대조를 보인다. 그가 얼마나 도시에서 불에 테이었으면 그렇게 그렸는지 모르겠다. 한 때는 화려한 장미꽃이었으나 진드기에 시달리다가 노기(老妓)처럼 시들어버린 장미꽃 같은 여인을 감상하도록 시를 제공하는 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
하산하는 길에
처음 만난 여자가
술을 사달라고 졸랐다.
오뎅 국물과 김밥까지 먹은 그녀는
아침 겸 점심이라고 했다.
삼단 같이 치렁치렁
검게 내려오던 생머리 아래쪽에
노랑 물을 들여 멋을 내다가
양 갈래로 따 내린 머리카락은
인디안 추장 딸을 방불케 했다.
<생략>
- 황송문의 시 「사연(事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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