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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이와 깊은 해변<김치를 담그면서>전체보기 2010. 11. 16. 16:06
우렁이와 깊은 해변 김길순
- 김치를 담그면서 -
김치를 담다가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났다. 부실한 몸으로 이렇게 죽기 살기로 힘겹게 김치를 담가놓으면 딸들이 다녀가면서 번번이 가져가기 때문이었다. 금치를 담글 때는 다시는 주지 말고 우리만 먹어야지 하다가도 막상 딸들이 찾아오게 되면 이것저것 싸서 주는 보따리에는 김치가 포함되기 마련이다.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는 '우렁이 설화'가 있었다. 우렁이의 새끼들은 어미 우렁이의 살을 파먹고 자란다고 했다. 그 새끼들이 다 자라서 더 이상 파먹을 살이 없게 되면 그 껍질만 남은 어미 우렁이 껍질은 물위에 둥둥 떠내려간다고 했다.
우렁이 새끼들은 자기들이 어미의 살을 파먹은 바람에 그리 된 줄은 모르고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면서 "우리 엄마 가마 타고 시집간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제 어미가 이렇게 힘들게 김치를 담가놓으면 번번히 가져가는 딸들이 얄밉다가도 할머니의 우렁이 얘기를 생각하면 그것이 신의 섭리려니 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파고다공원.
노인들이 출렁거린다. 독립선언 이후 여기는 노인들의 허기만 파도치는 깊은 해변. 노인들이 하루 종일 녹는다. 흰 알약이 녹을 때처럼 표정이 나가고 힘줄이 녹고 질긴 지느러미만 남아서 기형의 유영을 끝내고 엉거주춤 나와 앉는다. 얼어붙은 입술이 태양에 녹는다. 노여움이 서서히 해동되다 허옇게 거품 문다.
가슴 뜯긴 얘기로부터
그림자가 된 빈 시간에 대하여
자모가 뭉개지는 말에 대하여
물체가 된 몸뚱어리에 대하여
종로 3가역. 거품투성이다. 허연 거품이 어둑어둑해지면 희미했던 하루를 뚝뚝 꺾으며 전동차는 3분 간격으로 해변을 출발한다. 없는 모래를 탈탈 털며 더 깊이 빠지러 가는 노인들. 끼리끼리만 알아듣는 거품 속 대화를 파도가 달려와 덮친다.
- 최문자의 시 「깊은 해변」-
이 시는 계간종합문예지 ?문학사계? (2008년 겨울호)지에 게재된 작품이다. 이 시작품에는 노인들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노인들이 청춘시절에는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국내외에서 중심역할을 했으나 늙고 병들자 별 볼 일없이 표정이 나가고 힘줄이 녹고, 마치 지느러미만 남아서 기형의 유형을 끝낸 물고기들처럼 엉거주춤 나와 앉은 노인들이 가슴을 친다.
옛날 할머니께서 말해주시던 우렁이가 깊은 해변에서 떠내려가는 게 보여서 김치 담그던 손을 멈춘 채 한동안 베란다 저쪽 용마산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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