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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가는 봄 外 2편나의 이야기 2024. 3. 21. 16:01
가는 봄 이승훈 가는 봄 말이 없고 그대 또한 말이 없네 붓 가는 대로 쓰고 싶지만 아직도 내가 모자라 붓을 들고 망설이네 창밖에 뚝뚝 떨어지는 꽃잎은 피인가 잉크인가 꽃 지면 여름이다 한마디 중얼거리고 아무렇게나 쓴다. 사르비아 이승훈 그대 다녀간 길이 내가 다녀간 길 하염없이 사르비아 핀다 사르비아 사이에 해아 뜨고 내가 서 있다 여기가 전생이다 사루비아핀다. 사랑 이승훈 비로소 웃을 수 있고 한가롭게 거리를 걸을 수 있고 비가 와도 비가 와도 비 를 맞을 수 있고 서점에 들려도 마음 이 가벼울 수 있고 책들이 한없이 맑 아지는 걸 볼 수 있게 된 건 투명한 책 들 앞에 두렵지 않게 된 건 모두 어제 네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말했기 때문 이야 네가 있는 곳! 따뜻한 곳! 그곳 으로 오라고!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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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 가슴에 안고나의 이야기 2024. 3. 20. 16:01
꽃다발 가슴에 안고 김길순 아무리 세상이 살기가 어려워도, 아무리 심신이 힘들더라도,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은 헛소리가 아닌 것 같다. 천국이 따로 없다. 3월은 시냇가 얼음 위로 우쭐우쭐 올라온 꽃도 있고, 남도 지방에서는 매화꽃부터 꽃이 피며, 새 풀옷을 입으시고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시고 한가락 뽑고 싶은 노산 이은상 시 봄 처녀 노래가 실감나는 계절이다. 자연은 아름답다. 꽃들은 꾸미지 않고 원색 그대로 빨강 노랑 하양 이렇게 나타내어 봄은 어린 병아리 같은 연초록이지만 사오월이 되면 진초록 신록이 찬란하게 치장한다. 가늘게 내리던 세우, 봄비가 멋고 햇살이 퍼지니 산야의 신록이 생기를 얻은 자태로 눈 앞에 다가 온다. 두 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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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인생은 짤고 예술은 길다나의 이야기 2024. 3. 19. 16:01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김길순 이 세상 만물들이 어느 하나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봄바람도 꽃바람도 영원한 것은 없다. 고산 윤선도의 중에서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 이라고 만물의 무상함과 그 순행을 노래한 것 같다. 권세가 강해도 십 년을 누리지 못하고 꽃이 피면 시들고 푸르름도 곧 변하게 되므로 만물의 순행법칙을 보고 고산 윤선도는 인생의 덧없음으로 노래 하였다. *** 조선조 시조시인의 1인자로 알려진 고산 윤선도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시가사상 쌍벽을 이룰만큰 조선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섬세하고 예술적으로 구사한 점이 가장 큰 공적으로 남는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십년 세도 없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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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저녁노을나의 이야기 2024. 3. 18. 16:01
저녁노을 김철 나이가 구상 시인 즈음 되니 저녁노을이 저녁노을 같지 않다. 언제나 황홀했던 그 붉은 빛깔이 문득 만장같이 보이기도 하고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 될 분화구의 입술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어차피 한 번은 들어가야 할 불잉걸 속의 세상 같기도 하고 처절한 인생의 절규가 피처럼 번져 있는 영사막 같기도 하고 그것을 바라보다 나는 눈을 감는다. 울긋불긋 단풍 든 저 하늘 건너편에 숨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또 하나의 나를 찾아 먼길하기 위하여. ※ 한국문학인 2024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작성 김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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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보면나의 이야기 2024. 3. 17. 16:01
얼굴을 보면 김길순 여자나 남자가 나이 60이 넘고 70대가 넘으면 외모만 보아도 대충 그 사람의 인격을 가늠하게 된다. 헬스클럽에 갔더니 어떤 아저씨는 머리를 단정히 하고 러닝머신을 땀이 날 때까지 달리다가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분은 청와대에서 근무했다면서 그분의 위상을 올려주려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집이 아주 가까운 10분 거리에 있는 데에도 고급승용차를 몰고 오는 심리는 무엇일까하고 비꼬는 이도 있었다. 링컨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말했다는데 요즘은 성형이 대세라서 주름을 없애며 살지만, 나이 80이 넘으면 원래의 그 사람의 인품이나 살아온 내력이 얼굴에 여실히 나타나는 것 같다. 온갖 사연이 담긴 얼굴들이 나이 들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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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구두 뒤축에 대한 단상나의 이야기 2024. 3. 16. 16:01
구두 뒤축에 대한 단상 복효근 겉보기엔 멀쩡한데 발이 빠져나간 구두의 뒤축이 한쪽으로 심하게 닳았다 보이지 않은 경사가 있다 보이는 몸이 그럴진대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마음의 경사여 구두 뒤축도 없는 마음의 기울기는 무엇이 보정(補正)해주나 또 뒷모습만 들켜주는 그 경사를 누가 보아주나 마지막 구두를 벗었을 때 생애의 기울기를 볼 수는 있을 것인가 수평을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되어버릴 생이여, 비애여 닳은 구두 뒤축 덕분에 나는 지금 멀쩡하게 보일 뿐이다 ※ 복효근 남원 출생. 1991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 외 다수 - 작성 김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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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죄책감나의 이야기 2024. 3. 15. 16:01
죄책감 최문자 남편 3주기 기일 나는 오늘 오래오래 노를 저어야한다 슬픔은 끈적끈적하고 사방으로 멀고 단단하다 사과를 깎고 있을 때 내가 욕조에 물을 틀고 있을 때 그는 나를 용서했을까 물을 잠그고 손을 말리고 노트북을 꺼내 어디를 펼쳐 봐도 용서 받을 수 없겠지 용서처럼 달달한 휴식은 없는데 죄책감이 후회를 스쳐 지나갈 때 서로 뚫지 않고 왜 서로 은밀하게 스미나 용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몇 번이나 집을 걸어 나갔다 저수지 옆길을 돌아 발자국이 끝나면 이렇게 걸어서 곧 용서 받을 수 있을까 하고 더 오래 걸었다 집으로 오는 길 그는 언제나 용서할 듯한 얼굴로 물새처럼 바다로 가고 노을 아래서 나는 허공을 젓고 있다 죄책감은 모래 언덕 그칠 줄 모르고 푹푹 빠지는 다음 생애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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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 <고야>일부를 올린다.나의 이야기 2024. 3. 14. 16:01
고야 / 백석(일부)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 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 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 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섣달에 냅일날이 들어서 냅일날 밤에 눈이 오면 이 밤엔 쌔하얀 눈귀 신도 냅일눈을 받노라 못 난다는 말을 든든히 여기며 엄매와 나는 앙 궁 위에 떡돌 위에 곱새담 위에 함지에 버치며 대푼을 놓고 치성이 나 드리듯이 정한 마음으로 냅일눈 약눈을 받는다 이 눈세기물을 냅일물 이라고 제주병에 진상항아리에 채워두고는 해를 묵여가며 고뿔이 와 도 배앓이를 해도 갑피기를 앓어도 먹을 물이다. 시 일부 ※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