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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겨울 나무나의 이야기 2024. 1. 19. 00:01
겨울나무 도 종 환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 말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숲을 이루어내지 않았는가 하찮은 언덕도 산맥의 큰 줄기도 그들이 젊은날 다 바쳐 지켜오지 않았는가 빈 가지에 새 없는 둥지 하나 매달고 있어도 끝났다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실패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이웃 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도 지킬 자리가 더 많다고 믿으며 물러서지 않고 버텨온 청춘 아프고 눈물겹게 지켜낸 한 시대를 빼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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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잣의 생각나의 이야기 2024. 1. 17. 00:01
잣의 생각 마경덕 식혜에 동동 뜨는 잣 참 가볍다 딱딱한 껍질에 숨어 한 송이로 부풀 때까지 하늘에 바친 기도는 얼마나 무거울까 겁 많고 속이 무른 잣 높은 나무에 매달려 아슬아슬 간덩이를 키웠지만 앞니로 깨물거나 망치로 살짝 건드려도 지레 으깨져 고작, 혀끝만 적시는 한 알의 살점 허기진 입을 채우려면 어림없을 거라고 귀찮고 까다로운 제 몸을 믿었을 것인데, 할머니가 누누이 일러준 머리 검은 짐승은 믿지 못한다는 말 잣나무에게 전해주지 못했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흰 살점만 발라내는 잣 까는 기계들 탈피 된 알몸이 수북이 쌓이고 순식간에 잣의 믿음이 사라지고 있다 ******* 마경덕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신춘문예 당선. 시집『신발論』『글러브 중독자』『사물의 입』『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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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내가 만일 外 진달래꽃나의 이야기 2024. 1. 15. 00:01
우리들은 우리의 언어에서 우리 겨레가 지닌 바의 민족의 얼을 찾고 향기를 찾아야 한다. 민족적 언어 속에는 향토적인 맛이 있다. 그 언어의 맛을 찾아 효과적으로 조립하여 표현 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만일 내가 만일 상한 가슴하나를 건질 수 있다면 내 삶은 허되지 않으리 내가 만일 병든 한 새명을 고칠 수 있다면 또한 한 사람의 고통을 진정시킬 수 있다면 또한 할 딱이는 새 한 마리라도 도와서 보금자리로 돌려 보낼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에밀리 디킨슨의 *****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이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이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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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은나의 이야기 2024. 1. 14. 00:01
낙엽은 낙엽은 세번 산다.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라든지, 떨어지는 순간의 그 반공중에서 한 번 살고 땅에 떨어져서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면서 또 한 번 산다. 그리고 흙속에 묻히게 되면서부터는 동면으로 들어간다.낙엽이 흙속 에 묻히게 되면 모든것을 잊고 긴 겨울잠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낙엽이 떨어질 때는 그렇게 곱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은행나무 잎도 붉은 단풍잎도 어디에 비 길데 없이 아름답다. 낙엽은 서럽다. 목이 시릴 정도로 파랗게 개인 가을 하늘 가에 소리 없이 져내리는 낙엽은 아름다움이 넘치고 넘쳐서 서럽기까지 하다. 낙엽은 왜 서러울까, 왜 쓸쓸할까, 아무래도 이별의 서러움을 잉태하기 때문인 것 같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만나고 헤어짐을 거듭하게 된다. 여기에 기쁨과 슬픔이 있다. 속잎 피어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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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 한백양(2024년 세계일보 신춘 당선작)나의 이야기 2024. 1. 12. 00:02
2024년 세계일보 신춘 당선작 웰빙 / 한백양 힘들다는 걸 들켰을 때 고추를 찧는 방망이처럼 눈가의 벌건 자국을 휘두르는 편이다 너무 좋은 옷은 사지 말 것 부모의 당부가 이해될 무렵임에도 나는 부모가 되질 못하고 점집이 된 동네 카페에선 어깨를 굽히고 다니란 말을 듣는다 네 어깨에 누가 앉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미 앉은 사람을 박대할 수 없으니까 한동안 복숭아는 포기할 것 원래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누구에게 잘하진 못한다 나는 요즘 희망을 앓는다 내일은 국물 요리를 먹을 거고 배가 출렁일 때마다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을 거고 옷을 사러 갔다가 옷도 나도 서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잔뜩 칭찬을 듣는 것 가끔은 진짜로 진짜 칭찬을 듣고 싶다 횡단보도 앞 노인의 짐을 들어주고 쉴 새 없이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