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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방 /김길순 전화는 은밀한 방이다. 밀어가 무성한 암실에 둘만의 즐거움을 오갈 수 있는 갇힌 바람의 하늘이다. 푸른 바탕에 보석들 수놓은 밤하늘에 잠기다가 도란거리는 별들의 소곤거림이다. 하나의 방에서 하나의 꽃 이불을 둘이 함께 덥고 사는 꿈의 침실이다. 오오, 그러나 꽃방석 꽃 속..
고추잠자리의 향수 김길순 가을은 초로의 계절이다. 파랗게 개인 하늘에 빨갛게 익는 홍시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화가가 되어 그림이라도 그리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홍시처럼 익기 시작하는 초로의 연령은 아마도 사십 오십 세쯤이 될 것이다. 이 나이가 되면 사물을 보는 눈이 좀 그윽하게 ..
여자의 몸 김길순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택하라 하면 나는 미와 사랑의 여신으로 나타난 고대의 나체화를 들것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라 하면 1482년에 완성된 산드로봇티첼리(1444-1510)의 「비너스 탄생」같은 명화를 소개할 것이다. 이 그림에서는 맑고 밝은 생명의 힘이 생생하게 일렁이고..
옐로우 트리 커피를 / 김길순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은 옐로우 트리 커피 카페를 찾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 찻잔이 입술에 닿을 때면 따뜻한 친구도 되어 주고 외로운 영혼의 안식이 되어 준다. 연인들은 다정하게 소곤소곤 부풀어 오른 거품위에 청춘을 입맞춤한다. 경음악이 흐르고 네..
동전 한 닢의 슬픔 김길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도 땅에도 내 가슴에도 . 공중전화기에 동전을 넣고 번호를 눌렀다. 꽃다발 같은 기대는 툭 소리와 함께 동전을 삼켰다. 나는 새롭게 용기를 내어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저쪽은 통화 중 뚜뚜 나의 동전은 또 굴러 떨어졌다. 지갑도 핸드폰도..
메밀꽃대 홍학다리 김길순 소라 빛 하늘 아래 가을 햇살이 텃밭을 태운다 연둣빛 꽃망울로 유년을 깨우더니 눈부신 미리내 수만 송이 소금처럼 반짝인다 새빨간 정열 홍학의 다리로 일어나 받쳐 든 꽃대 군무로 너울거리고, 온몸으로 가슴 저미어 약속에 여무는 까만 씨앗들 봉평을 지나는 발걸음을 ..
한지 패션 ‘세계를 입다’ 김길순 지난 시간의 껍질을 우려내어 오늘의 창호지를 만드는 한지 그 닥나무 껍질 가마쏱에서 푹푹 우려내면 우려낼수록 투명해져 눈부시게 흰색으로 오색으로 태어났다. 딱하며 꺾이는 닥나무 바람소리 세계를 몰고 왔다 화려한 드레스와 외출복으로 패션쇼의 매력은 ..
아베마리아 슈베르트 곡 김길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죽음보다 깊은 잠의계곡을 지나 실낱같은 의식으로 떠오를 때 내면의 혼곤한 의식을 깨우며 신천지에 들려오는 소리 아베마리아 아득히 들리는 햇살이 창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떠내려갔는지 알 수 없어도 재생의 먼 빛이 꿈틀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