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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퍼 올리는 두레박 / 김길순 유년시절 두레박으로 샘물 푸던 꿈을 꾸었네. 감꽃이 떨어지는 계절 풀벌레도 울어 샀고 어머니 밭일 갔다 늦게 오실 때엔 큰언니 샘물 길러 저녁밥 지었 다네. 세월이 오래 지난 지금 꿈 속에서 향수를 퍼 올리고 있었네. 옛 꿈이 지금의 내 삶이였을까. 지금도 삶의 두..
접시꽃 일생 / 김길순 풀들이 무성한 길섶에서 아파트 좁은 공간에서 꽃이 핀다 해도 처소를 탓하지 않는다. 달덩이 같은 아들 딸 잘도 낳아 기르던 조선의 어머니 같이 꽃망울 주렁주렁 여름 비바람에도 꼿꼿이 보듬고 서서 꽃답게 피어내는 접시꽃 여자의 일생처럼 저리도 바쁠까.
희망의 5월 / 김길순 사월을 침묵하다 깡마른 몸으로 지내다 툭 툭 새순 터져 나오려는 담쟁이넝쿨 오르려고 온몸을 눈부신 햇살을 휘감아 보려는 포르스럼한 줄기 빛 살아난다. 담쟁이의 한 생애 저건 아픔을 다 쏟아내고 열정을 쏟아보려는 담쟁이의 출발이 예사롭지 않다. 온통 담벼락을 다 덮을 때..
빗물방울 / 김길순 투명한 유리창에 은색 물방울이 떨어진다 낙하가 싫어서 매어 달린 물방울도 처마에 붙어 있다. 그러다가도 한순간 미끄러지듯 주르륵 아가의 눈가에 맺힌 구슬이 떨어진다. 어느 돌배기 아기가 해외 입양하던 날 눈물방울처럼 맺혔다 떨어진다. 유리창에 붙은 저 물방울들 엄마 가..
귀로 김길순 택시는 방배동에서 고속터미널까지 지체된지 한 시간 차창에 어리는 나뭇잎 한강 물에 비치는 낙조 감상은 조각나 버리고 몇 차례 마신 녹차는 창자의 벽을 타고 급강하여 종점에서 문을 두드린다 절박한 순간 미로를 벗어나 내린 터미널 지하철역 경부선 호남선 바쁜 나그네 길 나는 7호..
가랑비 오는 날 김유정 생가에서 / 김길순 가랑비가 김유정 소설 꾸러미를 풀고 있었다. 소설 내용이 가랑비에 풀어지고 있었다. 푸는 이야기와 풀려지는 이야기는 창호지 문살 같은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만무방 응칠이가 즐겨하던 낡은 화투짝들, 솔광과 싸리 껍질에도 세월 한 자락 멎어 있었다. ..
할미꽃 나의 엄니 / 김길순 까칠한 덤불속에서 피어난 할미꽃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고개를 떨 구고 계십니까. 온갖 세상일 마다지 않으시고 한세상 살고 가시더니 피멍들어 꽃자주로 태어나셨습니까? 엄니! 당신의 가슴 속 같이 따사로운 솜털 모자를 쓰고 오셨네요. 웃음소리도 다툼소리도 들리..
개미의 미학 김길순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미들 서로서로 몸을 비벼 준다. 작은 통로를 힘겹게 빠져나와 태양의 열을 받으면서 단체로 움직인다. 몸 무개 1mg정도인 개미가 일용할 양식 쌀가마니를 끌고 오듯 집까지 운반한다. 들풀 한포기 뽑으면 개미들의 왕국이 무너지고 하얀 알이 흩어져 우왕좌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