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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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북천나의 이야기 2023. 4. 22. 00:01
북천 안도현 경남 하동에도 있는 북천 경북 상주에도 있는 북천 강원도 고성에도 있는 북천 지명에도 있고 하천명에도 있고 간이역 이름에도 이대흠의 시에도 스님 법명에도 있는 북천 북천의 뒷산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살고 사시사철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이 출시되고 아이스크림 장사보다 참나무 장작 장사가 더 잘 될 것 같은 북천 청둥오리 떼를 잡아 연탄불 위에 굽는 저녁이 왁자할 것 같고 큰 강의 얼음장은 국어대사전보다 두꺼울 것 같고 이런 추측은 북천이니까 가능할 것 같고 꽁꽁 얼어붙은 북천에는 투기꾼들이 묵을 여관이 없고 고층아파트를 짓지 않으니 은행에 대출하러 갈 일이 없고 은행원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을 필요가 없고 연대보증 부탁하는 시간에 처마 끝 고드름을 따먹을 수 있어 좋고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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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김창열 화백나의 이야기 2023. 4. 20. 00:01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김창열 화백 김창열 화백은 물방울 그림 연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한순간 찬란히 반짝이지만 이내 또르르 굴러 사라져버리고 말 물방울을 평생에 걸쳐 캔버스에 담았다. 평론가들은 그 배경에 김화백이 겪은 삶의 고난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평안남도 출신으로 광복 이후 남쪽에 정착했다. 청년 시절 이쾌대 화백(1913~1965) 에게 그림을 배웠다. 이북출신이자 월북 화가의 제자라는 이유로 온갖 처벌에 시달렸다. 1965년 프랑스에 정착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이방인이긴 마찬가지였다. 김화백은 고통스러운 과거, 알 수 없는 미래 대신 현재에 집중했고 그 과정에서 물방울 작품이 탄생했다. 고 김창열 화백의 생애를 담은 다큐 영화 시사회가 파리에서 열렸다. 영화의 제목은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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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갈 데는 어디?나의 이야기 2023. 4. 19. 00:01
내일 갈 데는 어디? 김길순 어제는 그이와 동행해서 내과에서 약을 타오고 오늘은 한방에서 무릎에 침을 맞고 온다. 내일은 임플란트 치료 차 치과에 가야 한다. 예약이 되면 다음 주에 또 가야 한다. 4월 산과 들 길거리 어디에서도 봄꽃이 화사하고 좋은데 봄꽃놀이 한번 멀리 못 가지만 티스토리 여행 구독자들이 다녀온 산풍경 꽃풍경을 보며 좋아요! 공감 누르는 재미도 솔솔 하지. 내일 갈 데는 치과 그리고 어디더라 하면 갈 데는 천지삐까리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 삐까리는 '낟가리'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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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그대 떠난 빈자리에 外 3편나의 이야기 2023. 4. 18. 00:01
그대 떠난 빈자리에 이위발 바람이 불었다 그대가 초승달처럼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 하늘은 그을린 솥단지 바닥처럼 시커멓고 구름장은 한 군데도 틈새가 없었다 사납게 일렁이는 나뭇잎들의 물결에 손금 같은 산봉우리들이 비에 파랗게 질린 채 서 있었다 봄날 벌레처럼 의식은 벅찬 감흥으로 차올라 목련나무 잎들은 하나의 욕망이고 기도이고 눈물이고 회한이었다 그대와 마주치는 신비한 순간 나뭇잎들도 물보라 되어 몰려오고 솟구치고 날아다녔다 눈물보다 더 비극적인 그대의 미소 어떻게 내 심장이 비둘기의 둥지일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들의 편지들이 구구거리며 날갯짓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안개는 엉긴 우유처럼 짙어지고 있는데 상처,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이위발 열차를 타고 달리는 사라진 그대 앞에서 겸허하게 고개 숙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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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안전 안내문자나의 이야기 2023. 4. 17. 00:01
안전 안내문자 마경덕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찾아오는 낯선 이름들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찾아달라는 간절한 부탁이 난감하다 이름 나이 성별 키 몸무게 옷차림 실종된 날짜가 휴대폰에 뜬다 짝짝이 신발을 신고 기억을 벗어두고 나간 사람들은 집을 두고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흘깃 보고 삭제되는 실종자들 짧은 연민이 다녀간 빈자리에 다시 날아와 자리를 잡는 넘치고 넘치는 사건들 검지손가락이 잠시 망설인다 어느 퇴직 형사는 범인들을 잡고 보니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집을 잃고 어둠 속을 떠돈다는 건 세상천지 외톨이가 맨손으로 칼날을 움켜쥐는 일 기억을 실종한 낙엽 한 장 철지난 얇은 옷을 입고 벌벌 떨며 망망대해를 표류 중이라고 물속 깊이 가라앉기 전 안전하게 집으로 보내달라고 부고보다 더 쓸쓸한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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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물까치나의 이야기 2023. 4. 16. 00:01
물까치 최지안 나무봉지는 과자다 흔들면 새가 쏟아졌다 상추밭에서 저녁을 쪼더니 쥐똥나무로 갔다가 단풍나무 속으로 퐁당 빠졌다 찰칵찰칵 핸드폰으로 찍자 찌르르 경보를 울린다 일제히 합세해서 울어댔다 새들에게 나는 침입자 내 집에서 나가라 새들도 나무에게 방세를 주었을까 출입문을 여닫을 때마다 나무가 주섬주섬 새들을 삼켰다가 도로 뱉어내었다 물까치는 꽁지깃이 연한 하늘색이다 몸보다 꽁지가 길어 작은 소리에도 파드득 놀라 옮겨 다니며 운다 약한 것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가보다 열 몇 번의 주소지를 바꾸며 살던 아비처럼 방 빼라는 말을 늘 머리 위에 얹어놓고 말이지 아비를 흔들면 시큰한 술 냄새와 기약 없는 희망이 주머니 속 구겨진 천 원짜리처럼 떨어지곤 했다 밟으면 과자처럼 바삭하게 부서지지도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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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나의 이야기 2023. 4. 15. 00:01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이예진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