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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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풀의 공식나의 이야기 2023. 11. 2. 00:01
풀의 공식 송문희 길섶에 자라는 한해살이들, 짧은 목숨도 채우지 못하고 오가는 발길에 밟히거나 바퀴에 뭉개진다 풀의 중심은 발길이 닿지 않는 곳 쓸모없는 풀의 목을 잡아채는 찰나 쓱, 손을 베였다 선명한 핏방울, 풀잎은 칼을 어디에 숨겼을까 풀이 살아남는 방식은 뿌리를 단단히 묻는 법 바람에 흔들리며 넘어지며 더 많은 씨를 뿌린다 손에 든 풀물 박박 문질러도 빠지지 않는다 풀의 피가 분명하다 *시집『고흐의 마을』2020. 달아실 ************************************************ 송문희 시인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를 졸업. 2004년 계간《시와비평》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충북제천시청, 부산 사하구청 평생교육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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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락의 계절나의 이야기 2023. 11. 1. 00:01
조락의 계절 김길순 11월 첫날 온기보다 냉기 쪽으로 가고 있는 날씨이다. 초록잎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 가고 붉은 단풍잎은 가랑잎 되어 한 차례 바람이 휘리릭 불면 날려 아파트 놀이터에도 뜰에도 이불처럼 깔린다. 단풍을 쓸어 모으는 경비원의 뒷모습을 보며 계절의 상념에 잠긴다. 단풍이 산야를 장식하고 날리며 떨어지는 조락의 가을 풍경은 서글픈 상념에 젖게도 한다.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를 읽노라면 낙엽 타는 냄새가 스쳐가는 듯하다. 도심에서는 낙엽을 비닐봉지에 담아 비료용으로 봄까지 모아 둔다. 낙엽 지는 가을이 되면 이효석 수필이 꼭 떠오른다. 이 수필은 제목부터 감상적이지만 센티멘털에 빠지지 않고, 생활의 의욕으로 전이했다. - 김길순 자작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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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어머닌 치매가 아니다나의 이야기 2023. 10. 31. 00:01
2023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어머닌 치매가 아니다 박청환 둘째 형 장례를 치르는 동안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로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둘째 형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 대신 어머니는 언젠가부터 셋째 형을 둘째네라 불렀다 처음부터 아들 사 형제가 아닌 삼 형제를 둔 것 같았다 마치 둘째 형이 애초에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 같았던 어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았다 글을 모르고 숫자를 몰라도 슬하 구 남매와 손주들 생일까지 때 되면 척척 꼽아 챙기시던 기억이 허물어졌다 매년 아버지 기일이면 두 해만 더 살고 따라가겠노라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제는 제사상을 보고도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물으신다 내 이름도 누나들 이름도 서로 뒤죽박죽 헷갈리신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셋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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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식사나의 이야기 2023. 10. 30. 00:01
식사 김길순 휴일 가을 날씨가 하도 좋아 산행하기는 이른 시간을 놓쳤고 탁구를 치기로 하고 그이와 스포츠 가방을 메고 버스 두 역쯤 되는 길을 걸어서 갔다. 그동안 집안에서 있었던 자질구레한 일들을 스매시 한방으로 무언의 볼을 치니 스트레스도 날려버리는듯 했다. 돌아오는 길에 꼭 점심식사를 하고 오는데 저번에 먹었던 팥칼국수는 말고 양이 너무 많아 남기고 온 아귀찜도 말고 오늘은 거리의 음식 간판을 보며 길을 걷는데 발걸음이 멈춘 곳은 "엄마손돈가스"집이었다. 나이프로 돈가스를 자른 후 소스를 바르고 고소한 맛이 빙벽을 타고 넘어가는 가는 순간 쿵- 하고 어머니 음성이 귀청을 때린다 엄마 손맛 느껴지니! 긴 세월 잊고 살았던 눅진한 어머니 말씀 지금도 어머니 피가 흐르고 있구나, 전신에 전율을 느끼는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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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가을의 기도나의 이야기 2023. 10. 29. 00:01
가을의 기도(祈禱)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을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구비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김현승 시 ‘가을의 기도’ 중에서 그런데 세속적인 사랑은 아닌 듯합니다. 절대자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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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나의 이야기 2023. 10. 28. 00:01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정호승 1973년 신춘문예 당선.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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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라봉 천혜향나의 이야기 2023. 10. 27. 00:01
한라봉 천혜향 엄한정 우리가 한때라도 만났던 것은 한낮의 꿈이었다. 반가운 눈이 내려 창문을 열면 향나무가 선 우물가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하얗게 기다리던 너 무슨 나의가시에 찔렸는지 어찌해 천혜향을 건네며 이제 끝났어요. 앙금 같은 향기만 남긴 채 우리는 처음처럼 악수를 하고 서로 모르는 사람이 되어 안녕이라고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서로 그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 문학사계 가을 79호에 발표된 시 ************************************ 엄한정: 1936년 인천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및 성균관 대학교 졸업. 1963년 과 등단. 시집으로 미당시맥상, 한국현대시인상본상. 성균문학상 본상. 한국문인협회감사. 국제팬클럽현회 한국본부 이사 역임.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작성 ..